『세시봉에 모이는 젊은 무리 중에서는 내 가 비교적 나이가 위였지요. 대부분 동생이 었어요. 윤형주는 고등학교 때부터 동신교 회를 같이 다니면서 성가대도 같 이 한 사 이예요. 얼마 전에 가수 김창완씨가 진행하 는 음악 프로에 윤형주가 나와서 내 얘기를 하더군요. 성가대 뒷자리에 선배 하나가 있었는데, 폼은 더럽게 잡으면서도 맨날 자 기 헌금을 내가 반을 빼앗아 내고, 대학엘 올라가더니 어디서 통기타 하나를 구해 들 고 다녔는데, 만지지도 못하게 하더라. 자 기가 전도양양하고 휘황찬란한 세브란스 의 대생에서 집안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가수가 된 것은 순 전히 조영남의 영향이었다 …하하하…그러 더군요.
내가 윤형주 헌금을 반 나누자고 해서 헌금 한 건 사실이에요. 지금도 만나면 그 때 꿔 간 헌금 돈 내놓으라고 해요. 그런데 생각 해 보세요. 어차피 하나님한테 드리는 건데 , 지가 내나 내가 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 송창식은 참 희한한 놈이었지요. 과묵하 고 황당한 인물이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 이 남루한 옷차림이었는데 얼굴은 허여멀게 서 거렁뱅이로는 또 보이지를 않았거든요. 항상 기타를 가슴에 부여안고 다녔지요. 레스토랑 가수로 데뷔할 때 부른 노래도, 뜻밖에도 오페라 「사랑의 묘약」 가운데 나오는 아리아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인 거예요. 생전 처음 듣는 창법이더군요. 오 페라 창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행가 창법 도 아닌, 송창식 특유의 창법이더군요. 아 마 지구상에서 그런 창법은 송창식의 창법 이 유일무이할 겁니다. 야 이거 선천적인 노래꾼이구나 직감했지요. 그나저나 노래는 그랬지만, 나머지는 오리무중이었지요. 초 콜릿을 물에 말아먹었다는 등 하면서 제법 무슨 귀족 행세를 하는가 하면 겨우내 팬 티 하나로 버티는 거예요. 우리는 그래서 송창식에 대해서 뭔가를 알아내겠다는 시도 를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어요』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김민기였다. 조 영남이 음대생이면서도 낮에는 주로 美大( 미대)의 서클룸이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 렸다면, 김민기는 미대생이면서도 노상 기 타만 뚱땅거리고 있었다. 김민기하고는 지 금도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낸다. 김민 기는 피해 다니는 생활을 하며 고생하다가 연극으로 진출했고 요즘 은 뮤지컬로 성공 했다.
『그밖에도 일일이 손꼽기가 어렵지요. 배 인순·인숙 자매 보컬인 펄 시스터즈도 그 때 만났고, 아직까지도 여성 듀엣으로 그들 을 능가하는 그룹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펄 시스터즈하고 나하고 트리오를 만든 적 이 있다는 것 혹시 아세요. 아는 사람이 별 로 없지요. 왜냐? 무대에 한 번 서보지도 못하고 끝나 버렸거든요. 우리 셋이 부르는 노래는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환상 그 자체였지만, 아무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었 어요. 꾀죄죄한 내 행색과 몰골이 결정적이 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때 검정 물들인 야전 점퍼에 워카를 신고 다녔는데, 가뜩이나 키도 작고 못 생 긴 얼굴에 행색마저 그 모양이었으니 사람 들은 노래를 듣기도 전에 관심조차 기울이 지를 않더군요. 저 얼굴로 뭐가 되겠냐는 투였지요. 나 때문에 배인순 자매는 한국 여성의 평균을 훨씬 넘는 늘씬한 몸매에 빼 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덩달아 덤터기를 쓴 셈이었지요. 아무튼 여기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그 무렵 한창 청년문화다 뭐다 , 청바지에 통기타, 생맥주가 새로운 청년 문화의 상징이다 뭐다 유행했는데, 말하자 면 그때 그 풍조를 이끈 그룹이 우리들이었 던 셈이지요. 더 알고 싶으시면 내 책 「놀 멘 놀멘」을 보세요. 거기 다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