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LA 라디오 코리아의 사장으로 있는 가수 이장희는 오토바이와 콧수염으로 많이 기억되고 있지만, 70년대
중반 그는 우리 나라 최고의 인기가수였다.
그 역시 쎄시봉의 골수 멤버였는데, 하루는 이장희가 헐레벌떡 명동성당 성모상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똘강
이백천 선생과 용호 형을 비롯하여 몇몇이 성당으로 나갔다. 이장희는 어느 소녀의 어깨를 부여안고 지금 이 소녀와 약혼식을 거행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소녀가 누구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렇게 이장희는 매사에 당당했다. 이장희는 우리에게 무릎을 꿇을 것을 권했고 우리는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었다. 이장희는 그 소녀와 의미심장한 키스를 교환하더니 약혼 예식의 종료를 우리한테 통보했다. 우리는 '쎄시봉'으로 돌아왔고, 그 후에
우리는 이장희가 그날 성모상 앞에서 키스한 소녀와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끝내 못 들었다.
한번은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윤여정, 최영희 패거리들과 함께 시인 김남조 선생 댁에 저녁초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이장희가 우리 모두를 자지러지게 만든 것이었다. 이장희는 김남조 선생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선생의 장시 한편을 좔좔좔
읊어 내려갔다. 우리 모두는 말을 잊었다. 서울고 출신으로 연세대에 다녔던 이장희는 바로 그런 친구였다.
이장희의 노래들 중에서 '그건너', '한잔의 추억', '자정이 훨씬 넘었네', '편지', '당신을 처음 본
순간' 같은 folk rock계열의 노래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지금까지 한국 모던 포크 낭만주의 물결의 정수라고 여겨지는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아름다운 가사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영남의 '삽다리를 아시나요' 중에서 발췌 편집)
1968년 번안곡 꾸러미를 안고 트윈폴리오라는 듀엣으로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그는 통기타 붐의 한 아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내나라 내겨레>와 <밤눈>을 담은 데뷔 앨범과 초기의 최대 걸작 <나그네>와 <창밖에는 비오고요>를 담은 두번째 앨범을
연이어 내놓으면서 한국 싱어송라이터 계보의 거장이 될 것임을 예감케 했다.
70년대 초반 <피리부는 사나이>와 <한번쯤>의 성공으로 주류의 달콤함으로 기우는가 했으나 1975년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사운드트랙을 통해 <왜 불러>와 <고래사냥>을 터뜨림으로써 우리의 불우했던 청년문화의 마지막 불쏘시개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야>와 <토함산>을 담은 1978년 앨범을 신호탄으로 하여 외로운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이
앨범에서 송창식은 우리에게 대중음악의 예술적 품격을 가르쳐 주고 있다.
송창식은 베스트셀러의 스타가 아니라 스테디셀러의 작가이다. 비록 오빠부대의 열광을 끌고 다니진 않았지만
70년대를 살아남은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똬리를 틀고있는 저잣거리의 현자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득음이 누에가 실타래를 풀듯 그저 주어진 것은 아니다. 기나긴 그의 음악 이력을 통해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내면의 총독부와 힘겨운 투쟁을 거듭했다.
그는 초기의 <나그네>에서 중기의 <그대 있음에>, 그리고 이 앨범의 두 머리곡을 통해 탁월한 선율과 깊이 있는
가사, 그리고 거침없는 절창으로 이른바 '고급 음악'의 전당 속에 갇힌 한국 '가곡'의 본령에 도전했다. 그것은 천시의 시각으로 일관해 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전복의 작업이었다.
그 전복의 더듬이는 우리 대중음악의 근원적인 무의식인 트로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이미 데뷔 앨범에서 최인호의 노래말을 토대로 <꽃 새 눈물>이라는 트로트의 현대화를 기획한 바 있으며, <목련>에서는 간결한 소묘의 세계에 트로트를 끌어들여 천의무봉의 솜씨로 녹여낸다. 이 5음계 2박자의 애상과 영탄을 극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참새의 하루>에서 집대성된다.
민감한 청소년기에 60년대 미국의 자유주의 세례를 받은 그는 한국의 대중음악사에 모던 포크 혹은 포크록의 새로운 깃발을 꽂았다. 그의 초기 음악을 대표하는 걸작 <물 좀 주소>는 강렬한 록의 비트를 바탕으로 의지와 희망, 그리고 좌절을 본능적으로 포착한다. 특히 세 번째 절의 '이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오네' 같은 후렴구는 고음의 폭발적인 도약과 극적인 선율의 하강이 대비되는 인상적인 프레이즈로 새로운, 그러나 우리말의 노래를 목타게 기다리던 청년 청중들을 단번에 열광시킬 만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앨범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부정적 문제의식으로 인해 그의 표현은 금지라는 사슬에 걸려 들고 만다.
그의 삐딱한 시선은 단지 노래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쉰듯한 굵은 목청으로 여하한의 장식없이 질러 대는 그의 발성은 한국의 수용자들이 단한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위악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익숙하지 않은 한국어는 종종 문법의 틀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모호한 추상성까지 겹쳐져서 마치 의도된 의사소통의 파괴처럼 보이기도 했다. 70년대를 걸쳐 한국 모던 포크의 대표적인 곡으로 부상한 <행복의 나라로>와 1971년의 김민기의 앨범에도 등장하는 <바람과 나>같은 곡에서조차 그와 같은 뒤죽박죽의 수사학이 전곡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나 한 대수의 충돌하는 문맥이 단지 언어적 결함 때문일까? 그의 초기작 <인상>을 참조해 보자. 16마디에 불과한, 그리고 고작 5도 음정 사이를 서서히 하강하며 끝나는 이 느린 곡은 첼로를 동반하며 꿈을 꾸는 듯한 환각의 음조를 조성한다. 그는 후반으로 돌입하는 2절의 9마디째부터 다음과 같이 우울하게 가라앉는다. '보이네/ 거짓에 무너진 옛 세상이/ 해지기 전에 잠든 운명이/ 내 눈 앞을 막고 있네'라고. 오직 자신의 손으로 만든 그의 전 노래들은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을 향해 던지는 허무주의의 메시지를 가혹하게 상징화한다.
그는 한국에 나타난 최초의 포크(록) 아티스트였다. 가진 자에 대한 우회적인 -그래서 더욱 불온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옥이의 슬픔>이나 전형적인 통기타 사운드를 보여주는 <하룻밤>같은 표현은 4공화국의 독재가 비등점에 오르는 1975년에 발표한 그의 또 하나의 문제 앨범 <고무신>에 이르러 거의 해체적인 경향까지 포섭한다. 이 앨범은 한 대수 특유의 냉소가 번득이는 <오면 오고>로 운을 떼지만, '쓰라린 자유의 길에 나는 지쳤다'라는 관습적인 선율 규범을 파괴하는 <나그네 길>에 이르러 그의 독자적인 표현력은 극에 달하며 한국적 신명을 즉흥적으로 표출하는 <고무신>에 이르러서는 상상력을 목조르는 사회에서 그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를 예측케 한다. 이 앨범의 마지막 노래가 <희망가>의 리메이크라는 것은 그가 감당해야 했던 절망의 마침표였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떠났고, 돌아 오지 않았다. 다만 89년에서 91년에 걸쳐 매년 한 장의 앨범을 고국으로
전해 주었을 뿐이다. <무한대>, <기억상실>, <천사들의 담화> 같은 이 앨범들의 타이틀부터 그가 현실이라는 틀을 벗어나 전위와 즉흥의
자유연상으로 이행해 갔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대수가 등장함으로써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오랫동안 자신을 구금했던 통속적인 표현의 동면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는 70년대 한국의 권력자들에게 대단히 불쾌한 존재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대중음악이 정치와 자본의 그물을 걷어내고 자유를
서술해야 함을 스스로 실현했다. 한 대수는 한국 모던 포크의 미완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 나머지 여백은 바로 한국 대중음악의 위대한 봉우리
중의 하나인 동시대의 김민기와 그의 동행자인 양희은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자기 손으로 얼굴을 흉칙하게 찌그러뜨린 음반 재킷 속
사나이가 광폭한 목소리로 이렇게 시대의 갈증을 서술했을 때, 이 노래들과 그 주인은 곧 막다른 골목에 감금되어야 했다.
경남고등학교를 다니다 미국으로 이민간 한대수가 69년말 귀국하여 남산 드라마 센터에서 가진 공연은 이 땅에
새로운 노래 씨앗을 파종하는 전환적 시발점이 되었다. 그의 슬로건은 한마디로 '자유'였다.
그의 '자유'는 70년대 통기타 군단들의 대표적 레퍼토리가 된 '행복의 나라'처럼 리버럴리즘의 도도한 추상이기도
했고, 김민기가 유일한 공식 앨범에 담은 '바람과 나'처럼 절대적 구원을 향한 시정이기도 했으며, 저주받은 걸작이 된 75년 앨범 수록곡
'고무신'처럼 고정관념과 모든 경계의 허물어뜨림이기도 하다.
그러나 열여섯 마디의, 단순하고 압도적인 록 템포에 실은 이 '물 좀 주소'만큼 70년대 내면적 억압의 표층을
뚫고 나오는 젊음의 자연 발생적 폭발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도발적인 첫 4마디가 방황할 권리를 지닌 젊음의 도전이라면, 하강하는 마지막
4마디는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내세운 파시즘에 휘말린 이상의 좌절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유신 당국은 감수성의 시한폭탄 같은 존재를 비열한 방식으로 대중과 격리시켜 놓았다.
74년과 이듬해에 이어 나온 두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모조리 수거됐고, 유신의 정점인 75년에 나온 앨범은 마스터
테이프까지 압수하여 파기함으로써 자유의 부활을 원천 봉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흰 고무신 두 짝이 철조망에 걸려 있는, 상징적인 앨범 재킷 안에서 한대수는 이미 운명을 예견했다. 그는
'나그네 길'이란 노래를 통해 "쓰라린 자유의 길에 나는 지쳤다"고 쓸쓸히 독백했다.
입에 재갈이 물린 상황에서 한대수의 유일한 선택은 다시 이 땅을 떠나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문화적으로' 망명했고 뉴욕의 가난한 전방위 예술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노래가 던져준 메시지는 20여년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치 '물 좀 주소'의 3절 마지막 노래말처럼. '이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70년대 명동 거리에는 통기타 음악과 청바지에 생맥주가 넘실거렸다. 명동 유네스코회관 뒤쪽 패션골목을 걷다보면 'V 익스체인지'라고 간판이 걸린 4층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70년대 '한국의 내쉬빌'로 이름을 떨친 통기타클럽 '오비스 캐빈'이 있던 자리다.
음악에 얽힌 이 건물 역사는 음악다방 원조격인 60년대 중반 '심지 다방'으로 거슬러 간다. 이 다방은 그 시절 "없는 원판이 없다"는 명성을 날리며 팝송 마니아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주말이면 평화봉사단원과 미군들까지 몰려 발 디딜 틈 없을 정도였다.
심지다방 주인은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로 유명한 이정재의 동생 이지재(작고)씨. 6·25때 원판만 싸들고 피난길에 올랐다는 음악 애호가 였다. 심지다방을 성공시킨 그는 젊은이들 사이에 통기타 붐이 이는 것을 보고 69년 '오비스 캐빈'을 열었다.
무교동 '세시봉' 시대를 마감한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양희은 같은 통기타 1세대들이 대거 무대에 섰다. 세련되면서도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잘 살렸던 '오비스 캐빈'은 문을 열자마자 젊은이 명소로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오비스 캐빈'이 대성공을 거두자 70년 명동입구 코스모스백화점 건너편에 '금수강산'이 들어섰다. MC 이종환씨가 관여해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을 무대에 세웠다. 이들은 '오비스 캐빈'과 '금수강산'을 오가며 노래했다.
명동 통기타 시대는 70년대 중반 '쉘부르'가 문을 열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젊은이들 사이에 식을 줄 모르던 생맥주 붐도 한몫 했다. 후발주자인 '쉘부르'에는 이문세 남궁옥분 전영 신형원 같은 통기타 2세대들이 주로 출연했다.
70년대말부터 명동 통기타 살롱들은 급속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디스코를 출발로 거세게 불어닥친 가요계 유행 변화 탓이었다. 통기타 가수들은 하나둘 무대를 잃었다.
우리 대중음악사에 젊음의 낭만이 가장 넘쳤던 시절로 기록될 70년대 명동 통기타 시대. 그 현장들은 이제 경찰의 눈을 피해 명동 뒷골목을 숨어다니던 '장발 세대'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김민기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 통기타의 전사들은 애상과 영탄으로 점철되어온 기존 대중음악의 질서를 일거에 뒤엎고 자신이 디디고 있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대중음악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아침 이슬>을 담은 1971년의 김민기의 데뷔 앨범은 그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의 시점에서도 가히 한국 대중음악의 혁명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이 앨범에 이르러 한국의 대중음악은 프로모터의 이윤동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발돋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순간은 대학이라는 공동체를 배경으로 대중음악이(김민기가 일반적인 대중음악가로 데뷔하였다는 사실과 그의 노래가 금지곡이 되기까진 라디오에서도 곧잘 흘러나왔다는 사실!) 현실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이 땅에서 처음으로 증명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아침 이슬>은 서구적 모던 포크의 전형적인 문법, 곧 통기타와 하모니카에 기반하는 노래가 아니었다. 그러나 김민기는 아름다우면서도 힘 있는 우리말을 가곡 혹은 찬송가 스타일의 첫 번째 주제 동기와 무거운 낭송조의 두 번째 동기(곧 '태양은 묘지 위에' 로 시작하는 부분), 그리고 첫 번째 동기와 리듬 패턴은 같지만 드라마틱한 비장미를 갖춘 세 번째 선율 동기에 적용하면서 70년대의 청년 세대의 성가를 만들어 내었다.
그가 한국 대중음악의 독자적인 지평을 여는, 다시 말해 일본과 미국의 지배 문화에 구금되어 있던 이 변방의 음악 문화를 독립시키는 열쇠를 다름 아닌 우리 말의 운율감과 수사학적 규칙에서 찾으려 한 것은 다른 그의 노래에서도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이 앨범의 머리곡인 <친구>와 뒷면의 머리곡인 <길>을 보라. 그는 서구의 음계와 악기 음 속에서도 외래어나 한자어가 거의 섞이지 않는 자신의 가사의 한국적 호흡을 자연스럽게 분만시킴으로써 단순히 메시지 상의 반역이 아니라 음악적 무의식의 전복을 꾀한다.
한국 대중음악의 1차 혁명기를 조망하는 데에 양희은의 존재를 빠뜨려서는 안된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의 대중적 운반책은 바로 김민기의 데뷔 앨범과 같은 해에 데뷔 앨범을 발표했던 당시 서강대 1학년생 양희은이었다. 김민기에 있어서 양희은은 중요한 존재였다. <아침 이슬>, <새벽길>, <작은 연못>과 같은 노래들을 그 자신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양희은이 부조해내지 않았던가? 더욱이 하나의 이야기(NARRATIVE) 구조가 들어 있는 <백구> 같은 노래의 경우, 그 어떤 보컬리스트가 이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소묘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1975년 긴급조치 9호 이후 대중음악에 대한 권력의 폭력은 양희은의 수많은 동료들의 손발을 묶어놓는다. 그의 음악적 후견인인 김민기는 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70년대 후반을 양희은은 또 한명의 포크음악인인 이주원과 호흡을 맞춰 그의 두번째 시대를 열기에 이른다. <내님의 사랑은>을 비롯하여 <그리운 내님네는>, <한사람>과 같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뇌리에 또아리 틀고 있는 걸작 러브 발라드를 잇달아 내어놓으며 이 침묵의 암흑기를 홀로 살아남는다. 이때의 그에게 '사랑'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묵직한 통증같은 것이었으며 그것이 곡해석에 있어서 짙은 음영으로 표출된다.
김민기와 보냈던 시대, 다시 말해 70년대 전반기의 음악이 성가(ANTHEM)적인 원심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주원과 보낸 70년대 후반은 가곡(LIED)적인 구심력으로 내면화되는 시대였다. <들길 따라서>는 바로 이러한 특성을 유감없이 내보인 이주원과 양희은의 합작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송창식의 <그대 있음에>와 함께 이 노래는 우리의 대중음악이 근거를 상실해 버린 고급음악의 영역까지를 어떻게 침윤해 들어가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아직 삼십이 채 되지 않은 나이가 때이르게 맞이한 성숙미이기도 하다.
파괴적인 아마튜어리즘으로 오히려 빛났던 70년대 초기 포크의 도전적인 태도가 구금당할 수 밖에 없었을 때, 그의 노래는 이렇게 급격히 강한 자기부정의 발라드로 미끌어진다. 그러나 노래와 노래에 대한 태도가 성숙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집중성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이러한 성숙미의 내부에는 그야말로 어쩔수 없는 산만함이 발효된다. 확신은 불안으로 움트기 시작했고, 현실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의 태도는 숨어 엿보기의 정신적 파산을 불러온다.
대중음악계에서 양희은의 위상은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의 침울함을 상징하는, 마치 고립된 섬과 같았다. 모든 문제의식이 원천적으로 거세되어버린 대중음악계는 다시 통속적인 저급함이 주류로 롤백했고 그는 간간히 서는 대학축제 무대의 단골 손님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따라서 78년 앨범은 그의 열광적인 팬들인 그 세대 지식인의 초상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만큼이나 쓸쓸하다.
80년대를 맞은 양희은은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젊은 싱어송라이터 하덕규와 더불어 85년 <한계령>을 제작함으로써 그와 동세대들의 정서적 허무주의를 집대성한다. 음유적 성격으로 충만한 이 앨범을 통해 그는 자신의 젊은 시대와 완전히 결별하였으며 어느새 침착한 중년의 담담한 발성으로 자신을 규정하기에 이른다. 초기 그의 노래의 기초를 이루었던 세계에 대한 생기발람함은 80년대의 젊은 담당자들에게 이양되었고 그는 다만 한가지의 관심, 자신의 내면 풍경을 수채화 톤으로 담아내는 것을 음악적 과제로 남겨 놓았다. 양희은, 그는 꼭 20년 동안의 음악이력을 통해 그가 가담했던 세대의 정신사적 궤적을 그대로 밟은, 전후 제2세대 지식인들의 음악적 대변자였다.
대학가와 다운타운의 음악홀을 거점으로 융기했던 통기타와 밴드의 사운드는 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을 밀어내고 마침내 주류의 권좌를 차지했다. 청년의 문화가 드디어 어른의 문화를 굴복시킨 것이다. 그것은 비단 대중음악에 한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이른바 4.19 세대의 작가와 비평가들은 보수적인 문단을 재편했고 최인호는 <별들의 고향>으로 새로운 세대의 선두주자로 부상했다.
이 신조류의 극점은 1975년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이다. 기존의 톱스타를 전혀 고용하지 않은 이 박제당한 젊음의 영화는 송창식이 담당한 영화 주제가 <왜불러>와 <고래사냥>으로 하여금 차트 넘버원의 행진을 거듭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이 1차 혁명의 1막은 마감한다. 유신 정권의 분서갱유나 다름없는 가요 규제조치가 이 젊음의 목소리들을 감금시켰고 거의 대부분의 노래는 방송금지 혹은 판매금지 처분을 받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폭행의 1975년이 저물자마자 트로트의 '왕정 복고'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송대관으로 하여금 오랜 무명의 생활을 청산하게 한 <해뜰 날>, 그리고 60년대 서구 록음악의 세례를 받고 주로 야간 무대에서 밴드 생활을 했던 조용필이 내 놓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방송과 리사이틀 무대를 휩쓸었다. 자생적인 청년 문화의 시대는 철거 계고장을 받았으며 중심이 확고히 뿌리 내리지 못한 밴드의 문화는 통속적으로 야합하며 <오동잎>, <나를 두고 아리랑>, <사랑만은 않겠어요> 같은 주류 질서에 영합하는 '크로스오버(Cross-over)'들을 낳았다.
통기타에 탑재된 그 어떤 비판과 풍자의 문법이 제도권 안에서 용납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서울대 미대 출신의 또 한명의 포크음악인 이정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둠의 그림자가 짙어 가던 1974년에 터트린 고고성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판매금지 조치를 받았다. 그는 다만 <거리>라는 노래를 통해서 이렇게 읊조렸을 뿐이다. "말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말을 듣는 사람은 없으니/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만이/거리를 덮었네."
그런 그가 통기타를 들고 의탁할 수 있는 공간은 자연과 인간의 목소리가 자아내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리고 그 결실이 바로 1977년 모습을 보인 혼성 4인조 포크 그룹 해바라기이다. 높고 낮은 남녀의 목소리가 어울린 해바라기의 하 모니는 트윈 폴리오 이래 70년대 전반에 속출했던 숱한 듀오들, 가령 라나에로스포(은희,한민), 원플러스원(정종숙,박헌룡), 현경과 영애 등이 이루었던 하나의 조류를 집대성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이후에도 그에 필적하는 후속 주자를 꼽기가 어려울 만큼의 혁혁한 성과로 평가된다.
모던 포크의 짧았던 영화를 구현한 해바라기의 구성은 리더인 이정선에 남성 보컬에 이주호(이후 80년대 남성 2인조의 주역이 되는), 그리고 여성 보컬에 한영애(설명이 필요 없는!)와 김영미로 이루어졌으며 79년의 두번째 앨범에는 입대한 이주호 대신 이광조가 참여한다.
전설의 반열에 오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 앨범엔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네 명의 보컬리스트들이 재능을 겨루는 네 곡의 독창과 여덟곡의 합창이 담겨 있으며 그 어느 곡도 버릴 수 없이 소중한 미덕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정선과 이주호가 퉁기는 소박하고 깨끗한 기타 반주에 박수 소리가 리듬을 맞추는 머리곡 <구름, 들꽃, 돌, 여인>이 분만하는 자연의 친화력, 혼성 보컬의 엇갈림과 동행이 폭행의 추한 기억을 잠재우는 <내 마음>과 <하늘 가득히>는 음미할만한 절창이며, 이광조가 글을 쓰고 이정선이 곡을 붙인 김영미 독창의 <하늘>은 위태로운 선율의 상승과 더불어 가사 그대로 '돌을 던지면 호도알처럼 깨질듯한 가을 하늘'의 미감을 독창적으로 형상화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해 말에 또한 혜성과 같이 등장하는 삼형제 밴드 산울림이 없었다면 여전히 유효한 긴급조치로 암울했던 1977년의 한국 대중음악사는 그저 매너리즘의 경기장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젊은이들의 하위문화가 기성 질서를 뚫고 당당히 주류로 등장했던 첫번째 사례로 우리는 70년대 청년문화를 기억한다. 3선 개헌에서 유신체제로 이르던 그 엄혹한 시절, 젊은 대학생들은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를 두들기며 자유와 평화, 사랑과 순수의 세계를 향해 열망을 노래했다.
청년문화는 때로 이국적 취미를 동경하고 현실을 도피하는 몸짓을 했고, 때로 격정적 저항과 참여의 몸부림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편이든 젊은이답게 순수한 열정과 낭만, 그리고 현실에 대한 나름의 비판적 인식을 담고 있었다.
이 청년문화가 주류문화의 상업적 매커니즘 속에서 애초의 순수한 열정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 여전히 반대편에 남아 정신적 중심을 잡아주었던 것이 바로 김민기의 음악이었다. 그의 음악은 이른바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7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며 젊은이들의 고뇌와 투쟁, 좌절과 희망의 여정에 함께 했던 동반자였다. 그의 노래는 방송에서는 들을 수 없었지만, 젊은 대학생들의 치열한 삶이 있는 자리에서는 어디서건 들을 수 있었다. 권력의 오랜 박해와 금지는 사실상 그의 음악이 지닌 사회적 정당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할 뿐이었다.
김민기 음악이 그토록 오래 우리 삶과 함께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의미로든 상업주의적 의도나 전략의 산물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그는 늘 일기 쓰듯 담담하게 자기 삶과 의식을 노래로 그렸다. 그랬기에 오히려 당대 젊은이들이 공유했던 시대상을 담고, 많은 사람들로 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김민기 스스로 "나는 그저 작은 나의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이를 자신들 이야기로 확대 해석했다"고 술회하곤 하는 것은 그런 뜻에서 일면 진실을 담고 있다. 당대 젊은이들은 '친구'를 부르며 감옥과 군대로 끌려간 벗을 떠올렸고, '아침 이슬'을 외치며 거친 세상에 맞서는 고뇌섞인 결단의 힘을 얻었다.
김민기는 70년대말 발표한 노래극 '공장의 불빛'에서 자신의 70년대를 결산하며 80년대 상황에 대한 문화적 대응의 한 전범을 보여줬다. 그것은 80년대 문화운동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막상 자신은 80년대 소용돌이 속에서 조용히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 결실은 90년대에 와서 꽃피우기 시작했다.
'지하철 1호선', '개똥이', '모스키토'로 이어진 일련의 뮤지컬 작업에서 그는 70년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대에 대응하는, 그러나 여전히 치열함을 잃지 않는 현실인식과 창조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부박하기 짝이 없는 상업주의와 어설픈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횡행하는 혼돈의 세기말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치열한 현실인식과 창조정신이다
바람이 제법 맵던 68년 11월말, 남산 드라마센터 무대에 통기타를 둘러멘 젊은이가 섰다. '고무신' '물 좀
주소' 같은 풍자적 포크록으로 인기를 얻게 되는 한대수였다. 포크음악 본고장 미국에서 막 귀국했던 그는 이 공연을 통해 가요에 포크를 도입한 첫
인물로 기록 된다. 그러나 이후 우리 포크음악사는 순탄하지 못했다.
권위주의적이던 정치-사회 분위기는 포크에 깃들인 원초적 저항성을 용납하려들지 않았다. 이런 갈등은 우리 포크
가요의 다양한 가지치기와 현실 적응, 그리고 언더그라운드화를 부추긴 동인으로 작용했다.
70년을 전후한 초기 포크 가요는 한대수-서유석-김민기 트로이카 체제로 출발했다. 서유석은 '한국의 밥 딜런'을
자처하며 '학교앞에는 대폿집이 둘이요, 양장점이 열이오'식 사회 풍자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김민기는 토속적이고 메시지 강한 '작은 연못', '무궁화꽃'을 발표해 세력을 키웠다.
그후 몇년은 포크의 황금기이자 춘추전국시대였다. 젊은 가수들은 한결 같이 통기타를 다뤘다. 여가수로는
양희은-박인희-이연실이 삼두마차를 이뤘다. 양병집과 이필원이 포크를 표방했고, 송창식, 윤형주, 라나에로스뽀, 쉐그린, 은희, 김정호,
어니언스, 4월과 5월이 인기를 얻었다.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 시대도 이때 열렸다.
하지만 72년 '10월 유신'으로 상징되는 암울한 정치상황은 포크의 자유로운 정신을 압박했다. '아침 이슬'이
금지곡으로 낙인 찍힌 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75년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시의에 맞지 않음' '창법 저속', '불신감 조장'같은 모호한 이유로 금지곡을
양산했다. 송창식의 '고래사냥'은 영화에서 신체검사에 떨어져 낙담한 주인공이 자살하는 장면에 쓰였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한대수는 이 땅에 더 이상 노래를 쓰고 부를 자유가 없다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민기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자의반 타의반 활동을 접었다. 대중적 포크는 가사와 멜로디가 서정적인 소위 '포크송'으로 방향을 틀었다.
'섬소년'의 이정선, '고별'의 홍민, '밤에 떠난 여인'의 하남석, '애심'의 전영록이 인기를 얻었다.
김태곤과 정태춘은 국악과 불교에 바탕을 둔 한국적 포크를 잉태했다. 80년대엔 늦깎이 조동진이 독보적 영역을 구축했다. 서정성을 추구하며
언더그라운드라는 새로운 음악집단 을 이끌었다.
포크음악은 80년대 후반 컬러TV와 함께 불어닥친 댄스음악 바람에 결정적 타격을 입었고 그 후에는 이주호가
주축이 된 해바라기를 비롯해 한돌, 신형원, 유지연, 강은철 같은 뮤지션이 포크를 표방한 음악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70년대초 이후 포크음악의 또다른 맥은 대학가 저항가요로 이어졌다. 대학가 최고 유행음악은 포크에 뿌리를 둔 운동가요였다. 그 정점엔 김민기가 있었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전반은 캠퍼스 밴드의 전성시대였다. 졸업생과 재학생이 섞인 산울림이 시장 안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동안 재기 넘치는 기타리스트 김수철이 이끈 작은 거인은 두 장의 앨범을 내 놓으며 진지한 수용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수도 없이 난립한 특권적인 등용문을 통해 대학의 아마튜어 음악 청년들은 기약없는 무명 생활의 통과제의를 생략할 수 있는 특혜를 부여받았다. <그대로 그렇게>의 피버스, <그때 그 사람>의 심수봉과 <돌고 돌아 가는 길>의 노사연뿐 만 아니라 나중에 방송진행자로 이름을 드높이게 되는 왕영은과 주병진도 이 끝없는 명단에 포함된다. 특히 왕영은과 함께 해변가요제에서 '여름'으로 대상을 받았던 '징검다리'는 '뭉게구름', '님에게' 등의 아름다운 노래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었다. 물론 1회 대학가요제 그랑프리 팀인 서울 농대의 샌드페블즈나 TBC 젊은이의 가요제의 출품곡 <연>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연세대 밴드 라이너스 같이 아마튜어 교내 밴드로서의 성격을 버리지 않은 팀도 없지 않았지만 이 가요제들을 통해 스타덤으로 쾌속 진군하려는 야심은 곧바로 캠퍼스의 노래 문화를 상업적으로 유도하게 했다.
그러나 가장 선연한 주목을 모은 두 팀은 바로 배철수와 구창모가 각각 보컬을 맡은 항공대의 밴드 런 웨이(RUN WAY)와 홍익대의 블랙 테트라(BLACK TETRA)였다. 이들은 1978년 동양방송이 주최한 제1회 해변가요제에서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와 <구름과 나>를 출품하여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이 두 팀을 주축으로 6인조로 재편성된 송골매는 1982년 <어쩌다 마주친 그대>(구창 모 작곡)와 <모두 다 사랑하리>(김수철 작곡), 빗물을 터뜨리면서 산울림 이후 주류 시장에서 성공한 첫번째 밴드가 된다.
이들의 연승 행진은 무서웠다. 세련된 서구 창법의 구창모와 질박하고 무뚝뚝한 스타일의 배철수가 벌인 이인삼각의 이미지는 바로 이 밴드의 원동력이었고, 또한 분규의 먼 원인이기도 했다. 결국 네번째 앨범을 발표한 뒤 구창모는 홀로 떨어져 나가 <희나리>를 성공시켰고, 나머지 다섯명은 '구창모가 없는' 송골매의 운명을 떠맡았다.
하지만 통산 다섯번째가 되는 1985년의 앨범을 통해 송골매는 하나의 훌륭한 한국의 록 밴드임을 스스로 증명하면서 주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 선제탄 은 <하늘나라 우리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의 작곡자로, 록과 우리의 전통적인 서정을 결합하는데 특출한 재능을 조용히 빛내 온 라원주가 제공한 이 노래는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라도>와 함께 송골매의 전화위복을 또렷하게 주장한다. 화려한 도약과 수식을 배제한 낭송조의 선율 진행은 이들이 소녀 팬들의 아우성으로부터 벗어나 이 땅에서 록 음악을, 혹은 밴드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되묻는 성찰의 작업이나 다름 없었다. 6집의 <어부사시 가>와 7집의 <처용>은 이와 같은 맥락의 연장선이다.
구창모가 탈퇴하면서 시장에서의 송골매의 상업성이 퇴조한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들은 1990년까지 아홉장의 정규 앨범을 끈질기게 발표함으로써 명실 상부한 80년대의 밴드로 이름을 새겼다. 그것은 바로 '스타'가 아닌 '밴드'의 승리였다.
하지만 급속하게 진행된 대학음악문화의 상업화는 '광주'를 경험하며 '반미'의 구호를 가슴 속에 새겨 넣은 80년대 대학 세대로 하여금 록과 록 밴드를 '타락한 제국주의 문화' 혹은 '서구 추종의 소비 문화'로 인식하게 하는 역기능을 낳았다. 통기타를 기반으로 하는 대학의 노래서클(서울대의 '메아리'가 대표적이다)이 현실의 모순과 동행하며 당국의 탄압과 대학 동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동시에 받았다면 캠퍼스의 록 밴드는 '어용'의 낙인을 받으며 '자신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의 처지가 되고 만다. 서구에서는 영원한 동지의 관계로 발전해 온 록과 포크가 이 땅에서는 이상한 대립 아닌 대립의 위상으로 설정되는 아이러니가 연출된 셈이다.
1974년 <미인>을 들고 나온 '엽전들'이라는 미묘하게 자조적인 그룹명이 우리를 미소짓게 한다. 40년의 음악이력에 이르는 신중현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무늬를 아로새겼을까? 한국대중음악사는 영원히 그의 이름을 비켜갈 수 없다. 그는 일렉트릭 기타를 매고 나타난 한국 최초의 '아티스트'이다. 그에 의해 록이라는 서구대중음악언어가 이 땅의 목소리로 제련되었다. 그는 또한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음악감독이자 프로듀서였고 작곡가이자 수많은 그룹의 리더였다. 60년대 중반부터 그의 권능에 의해 펄시스터즈와 김추자, 김정미, 박인수, 장현과 같은 숱한 보컬리스트들이 이전과 다른 노래를 제출할 수 있었다.
신중현 사단이라고 불려진 이들에 의해 서구 대중음악언어가 이 땅에 자리 잡았으며 애상과 비탄의 정서로만 일관되어온 식민지 시대의 트로트 대중음악의 일방통행이 그 위세를 수그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서구의 록음악을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록 음악에 한국 전통음악적 요소를 접목시키기 위한 집요한 실험을 계속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람은 뭐니뭐니 해도 바로 자기 자신과 그의 밴드이다. 1974년의 <미인>은 일본적 5음계가 아닌 계면조적 음계를 해학적으로 해체한 기타의 인트로와 그전까지는 있을 수도 없었던 과감한 가사를 고용하여 퇴폐척결이라는 권력의 철퇴를 불러왔으며 그보다 2년전에 발표한 <아름다운 강산>은 글자 그대로 한국 록 음악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의 기타는 단순히 흉내내기의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우리만의 미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악기였으며 서구에 대한 동경으로 얼룩진 이 악기는 그에 의해 한국적 표현의 도구로 새로이 태어난다.
3인조 밴드 엽전들은 그 명칭에서부터 냉소적이며 풍자적이고 민중적이다.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록 밴드의 가장 근본적인 편성으로 하위문화의 독설적 성격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이 앨범은 변방에서의 록 음악과 그것의 정신이 단지 백인 중심의 서구 문화에 대한 일방적인 맹종이 아님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대학가를 근거지로 하는 김민기가 한국 대중음악사에 현실 반영적 비판의식을 불어 넣었다면 중졸의 사회적 '낙오자' 신중현은 서구 음악 문법의 일방적인 지배 체제로부터의 변방의 독립을 기술한다.
이 '한국 록 음악의 아버지'는 전통음악의 장단과 음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탈춤에서 상여소리에 이르는 민중예술 장르들의 해학과 초월과 전복의 정신을 대중음악의 어법으로 형상화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 앨범의 머리곡 <미인>의 상업적 성공은 오히려 이 앨범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방해물이 될 정도이다. 라-솔-미-레-도로 하강하는 <미인>의 5음계의 전주 속에 숨은 일렉트릭 기타의 가야금화(化), 상여 소리와 탈춤 마당의 정조를 재해석한 <나는 너를 사랑해>와 <나는 몰라>에서 상반되게 보여주는 진혼과 해학의 미학, 그리고 사랑 노래의 가사를 빌어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없는 말 뿐이야'라는 촌철살인의 후렴을 얻는 <할말도 없지만>의 숨은 텍스트, 그리고 이 '저주받은 걸작'의 대미 를 장식하는 연주곡 <떠오르는 태양>에 아롱지는 사이키델릭적 혼돈의 역설 - 이 보다 더 많은 것이 이 작은 음반 안에 빈틈없이 가득차 있다.
하지만 이 자유의 시간은 너무나 빠른 종말을 맞았다. 4공화국의 파시즘적 기조는 이 청년 문화의 전위들에게 정치적 불온과 '대마초 왕초'의 주홍글씨를 새기면서 표현의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 긴급조치 9호 국면의 이른바 '가요규제 조치'는 방송 활동과 음반 발매는 말할 것도 없고 야간업소 출연이라는 유일한 생계 수단까지 원천봉쇄하는 야만적인 폭력이었다. 신중현은 80년 '서울의 봄'이 올 때까지 무려 오년간을 창작할 권리를 빼앗긴 채 산하를 방황하며 보낸다. 그가 뮤직 파워라는 대규모 편성의 밴드를 통해 컴백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불혹을 넘어서 있었고 디스코와 발라드에 정신이 팔린 시장은 그를 이미 잊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신중현의 음악적 문제의식이 다음 세대에 비판적으로 계승할 기회를 얻지 못한 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바로 우리 대중 음악의 희망이 기약없는 연금에 돌입하는 뼈아픈 시점이기도 했다.